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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 119

강신애, 가장 조용한 죽음

몽골에서양 잡는 것을 보면사람 둘, 짐승 하나가 사랑을 나누는 것 같다 한 사람은 뒤에서 양을 꼭 껴안고한 사람은 앞발을 잡고명치를 찔러애인의 가슴을 움켜쥐듯 심장동맥을 움켜쥐고가장 고통 없이 즉사시킨다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속삭이는 주인의 품에 폭 안겨양은 한 마디 비명도 없이커다란 눈만 껌벅이고 있다 하늘의 솜다리 꽃이하강한 양 초원의 말발굽에 밟혀 진동하는 꽃향기처럼제 몸 냄새를 들판에 퍼뜨리지만에튀겐*에게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조용히 별로 돌아가는아름다운 환생을 지켜보는 것 같다[출처] 가장 조용한 죽음 / 강신애|작성자 마경덕

일상다반사/시 2014.11.19

허연,목요일

사람들 틈에 끼인 살아 본 적 없는 생을 걷어 내고 싶었다. 모든 게 잘 보이게 다시 없이 선명하게 난 오늘 공중전화통을 붙잡고 모든 걸 다 고백한다. 죽이고 싶었고 사랑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보라는 성경 구절에도 마음이 흔들린다고. 그리고 오늘은 목요일. 죽이 끓든 밥이 끓든 나는 변하지 못했고 또 목요일. 형상이 없으면 그림이 아니야. 따귀 한 대에 침 한 번씩 뱉고 밤을 새우면 신을 만날 줄 알았지. 그림 같은 건 잊은지 오래라는 녀석들 몇 명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투항과 술을 마신다. 그 중에 내가 있다. 오늘은 목요일. 결국 오늘도 꿈이 피를 말린다. 그 꿈이 나한테 이럴 수가.

일상다반사/시 2014.11.19

곽은영, 불한당들의 모험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 수 없어서 고유하고 외롭다까마귀가 반짝이는 거울을 모아가듯시간의 기류를 타고나는 두 발의 컴퍼스로 지도를 그려갔다 태양의 위도와 바람의 경도가 만나는 점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지그늘을 받아먹던 흰 벽에 누런 응달 자국이 앉을 무렵 지도는 그려질 줄 알았어자오선은 길게 펼쳐졌는데당신이 여기 있어도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 사이에희멀건 강이 눈부시게 흘렀다 강은 언제나 저만큼 웅크려 있다가 나의 다가섬만큼 모양이 변했다경계를 나누기 힘든 햇살처럼강은 측량하기 곤란한 빈칸우연 같은 위도와 필연 같은 경도가 내게서 만나는데 당신은당신의 자오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 침착해서 서글픈 물결을 이기고돋보기로 모은 태양점처럼 희멀건 강을 분홍코끼리 한 마리가 건너가길 바랐다당신과 내가 여기..

일상다반사/시 2014.11.19

김행숙, 밤에

밤에 날카로운 것이 없다면 빛은 어디서 생길까. 날카로운 것이 있어서 밤에 몸이 어두워지면 몇 개의 못이 반짝거린다. 나무 의자처럼 나는 못이 필요했다. 나는 밤에 내리는 눈처럼 앉아서, 앉아서 기다렸다.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나는 나를, 또 덮었다. 어둠이 깊어…… 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많이 가진 것이 밤이다. 밤에 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밤의 우물, 밤의 끈적이는 캐러멜, 밤의 진실. 밤에 나는 네가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낮에 네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낮의 스피커, 낮의 트럭, 낮의 불가능성, 낮의 진실. 낮에 나는 네가 떠났다고 결론 내렸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은 호주머니가 없고, 계절이 없고, 낮과 밤이 없겠지…… 그렇게 많은 것이 없다면 밤과 비슷할 것이다. 밤에 우리는 서로 닮..

일상다반사/시 2014.11.19

이문재, 큰 꽃

꽃들은 내려놓고 죽을 힘을 다해 피워놓은봄 꽃들을 떨구어 놓고봄나무들은 서서히 연두빞으로 돌아간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나는 봄나무들의 이름을 잊어버린다.산수유 진달래 산벗 라일락 철쭉꽃 진 봄나무들은 신록일 따름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꽃이 지면 같이 울지못한다.꽃이 지면 나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진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나무가 저마다 더 큰 꽃이라는 사태를활활 타오르는 푸른 숲의 화엄을나는 눈뜨고도 보지 못한 것이다. 꽃은 지지않는다.꽃이 지면 나무들은온몸으로 더 큰 꽃을 피워낸다.나무가 꽃이다.

일상다반사/시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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