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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글 119

최라라, 곡선의 어떤 형태

1.좀 먼 얘기지만 이건 향유고래 이야기야 크리스마스 이브였어 고래는 해안선처럼 누워있었지 그 적나라한 곡선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생각해 본 적 있니 어느 날의 죽음에 대해 고래는 제 죽음이 그리 둥글 줄 생각이나 했을까 2.그 저녁에 떨어진 사과는 처음부터 둥글었으나 사과만 모르는 사실이었다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었으므로 꿈꾸지 못하는 세계가사과에게는 있었다언제나 있어서 한 번도 없었던 생각이명이었다 둥근 씨앗은메아리가 되는 곡선의 한 형식이 사과를 거쳐 사과에게 간다 3.둥글게 돌아가는 계단의 중간이었다그곳에서 당신은 헤어지자 했다계단이 끝날 때까지 걷다 보면뒤돌아봐도 뒤는 안 보일 거라고이별인 줄도 모르게 이별하는 거라고 4.곡선은 대체로 위험하다당신에게 가는 내 마음처럼 당신에게 갔다 돌..

일상다반사/시 2014.11.19

고정희,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길을 가다가 불현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두 눈을 깊게 뜨고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첼로를 켜며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그 불 다 사그러질 때까지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달력 속에서 뚝 뚝꽃잎 떨어지는 날이면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 와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

일상다반사/시 2014.11.19

김이듬, 정말 사과의 말

만지지 않았소 그저 당신을 바라보았을 뿐이오 마주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소 난 당신의 씨나 뿌리엔 관심 없었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고 싶지 않았소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소 우리가 태양과 천둥, 숲 사이로 불던 바람, 무지개나 이슬 얘기를 나눌 처지는 아니잖소 우리 사이엔 적당한 냉기가 유지되었소 문이 열리고 불현듯 주위가 환해지면 임종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오 사라질 때까지 우리에겐 신선도가 생명으로 직결되지만 묶고 분류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한 칸에 넣었을 것이오 실험해보려고 한 군데 밀어 넣었는지도 모르오 당신은 시들었고 죽어가지만 내가 일부러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었기 때문에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소 내 생리가 그러하오 난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기를 잃게 하오 내가 숨 쉴 때마..

일상다반사/시 2014.11.19

이영광, 높새바람같이는

나는 다시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 내겐 지금 높새바람같이는 잘 걷지 못하는 몸이 하나 있고, 높새바랑같이는 살아지지 않는 마음이 하나 있고 문질러도 피 하나 흐르지않는 생이 하나 있네 이것은 재가 되어가는 파국의용사들 여전히 전장에 버려진 짐승 같은 진심들 당신은 끝내 치유되지 않고 내 안에서 꼿꼿이 죽어가지만, 나는 넝마를 두르고 앉아 생각하네 당신과 함께라면 내가. 자꾸 내가 좋아지던 시절이 있었네[출처] 높새바람같이는ㅡ이영광|작성자 임현정

일상다반사/시 2014.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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