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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시 81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밑으로 뚤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상다반사/시 2024.06.28

최금진, 잠수함

나는 잠수함, 네가 사는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자꾸 아래로 침잠하는 버릇, 아무데도 정박할 수 없구나 문어발처럼 뻗은 섬의 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용암을 토하는 화산의 아가리가 얼마나 깊은지 나는 네가 그런 어둡고 탁한 깊이를 평생 모르고 살아가길 바란다 어느날엔가 그냥 장난처럼 낚싯대를 가지고 와 그 끝에 잠시 파닥거리는 웃음을 미끼로 달고서 재미있게 하루를 드리웠다 가거라 그때 나는 온통 철갑으로 둘러진 무거운 몸을 죄악처럼 입고서 네 그림자 밑을 조용히 스쳐지나갈 것이다 녹슨 쇳조각 떨어져내리는 폐선처럼 심해의 어둠에 나를 꿇어앉혀야 할 일만 남은 것처럼 미안하다, 너에게 가지 못한다 나는 잠수함, 물 밖으로 꺼내놓은 작은 잠망경 하나에 행복한 너를 가득 담고서 네 앞을 지나간다 깊은 해구 속에..

일상다반사/시 2024.06.27

신경숙, 깊은 슬픔

네가 놀이터에 그가 없는 걸 보고서 바로 돌아오기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 너는 오래도 그를 기다리더군. 오래도록 그를 기다리고 서 있는 널 보며 느꼈지.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무너지게 할 거라는 걸.   난 그렇게 되어 버렸지. 너에 의해 죽고 싶고 너에 의해 살고 싶게 되어버렸지.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뭔가를 기다리지받아들이기 위해서 죽음까지도 기다리지. 떠날 땐 돌아오기를,오늘은 내일을, 나는 너를.  넘어져서는 일어서기를,   그래, 사진을 태운다고 잊어지는 건 아니지, 만날 수 없다고 헤어진 건 아니지. 이렇게 다 마음속에 쌓여 있으니, 때로 들여다보지 말아야 할 시절이 있다 해도 그깟 사진을 태운다고 잊어지는 건 아니지    이 불면의 나날 속으로 다시 헤엄쳐와 내 눈 감겨주길.지금 자..

일상다반사/시 2024.06.26

나는 어리다, 박시하

나는 어리다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연못 위의 개구리만큼 작고해변의 갈매기처럼 낡고동굴 속 부싯돌처럼 캄캄하다 나는 본다이슬 위에 맺힌 이슬어둠 아래 깔린 어둠을나는 잡는다줄줄 흘러내리는 것스르르 빠져나가는 것들을 나는 웃는다돌부리들이 농담을 건네서지렁이의 허리가 꿈틀거리니까온갖 아픔이 저토록 어설픈 모습이라서가끔은 운다어떤 사람의 발이 젖어 있어서함부로 친 펜스가 비구름 색이고죽은 고양이의 발바닥이 분홍색이라서 나는 안다부서진 식탁에서 밥 먹는 법을뺏긴 이불의 따스함과빛을 잃은 사람의 눈 속에어떻게 다른 빛이 생겨나는지를다만, 모른다너의 목록이 얼마나 다양한지너의 이마가 얼마나 번쩍이는지너의 어깨가 얼마나 단단하고너의 가죽이 얼마나 두툼한지는 나는 느낀다날아간 새의 날갯짓과시든 꽃의 향기를나는 사랑한다..

일상다반사/시 2015.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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