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 수 없어서 고유하고 외롭다

까마귀가 반짝이는 거울을 모아가듯

시간의 기류를 타고

나는 두 발의 컴퍼스로 지도를 그려갔다


태양의 위도와 바람의 경도가 만나는 점이 내가 서 있는 곳이었지

그늘을 받아먹던 흰 벽에 누런 응달 자국이 앉을 무렵 지

도는 그려질 줄 알았어

자오선은 길게 펼쳐졌는데

당신이 여기 있어도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우리 사이에

희멀건 강이 눈부시게 흘렀다


강은 언제나 저만큼 웅크려 있다가 나의 다가섬만큼 모양이 변했다

경계를 나누기 힘든 햇살처럼

강은 측량하기 곤란한 빈칸

우연 같은 위도와 필연 같은 경도가 내게서 만나는데


당신은

당신의 자오선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


침착해서 서글픈 물결을 이기고

돋보기로 모은 태양점처럼 희멀건 강을 분홍코끼리 한 마리가 건너가길 바랐다

당신과 내가 여기 있어서 그릴 수 없는 길고 깊은 강과 마주섰다

당신은 잠깐 고개를 들었고 나는 잠깐 걸음을 멈추었지

비극의 첫 페이지가 무난하게 시작하듯

무심한 강은 눈부시게 흘렀다

탐 다오 탐 다오 코끼리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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