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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시 81

이현호, 붙박이창

그것은 투명한 눈꺼풀 안과 밖의 온도 차로 흐려진 창가에서 "무심은 마음을 잊었다는 뜻일까 외면한다는 걸까" 낙서를 하며처음으로 마음의 생업을 관둘 때를 생각할 무렵 젖는다는 건 물든다는 뜻이고 물든다는 건 하나로 섞인다는 말이었다.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나는 애인이나의 유일한 맹신이기를 바랐다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 있었다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일이었다. 거인의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바보는 듯 창밖은 깜깜. 보플 인 옷깃 여기며 서둘러 떠나..

일상다반사/시 2014.11.10

김혜순 - 새가 되려는 여자

꿈속에서 울어본 적 있나요너무 울어서 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저 바다 밑 깊은 곳에서 윙윙 목소리가 올라오는 것처럼 아무도 내가 부르는 소리 못 알아듣던, 그런 적 있었나요 꿈속에서 도망친 적 있나요 올라가도 올라가도 어딘가 도착하지는 않은 적 있었나요 꿈속에선 늘 갔던 곳인데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적 있었나요 그런 적 있었나요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만 당신에게 덥석 잡아먹힌 적 있었나요 이상하지요 당신이 날 잡아먹었는데 내가 당신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내 속에 날아든 것 같았어요 당신의 얼굴이 새처럼 작아지고 그 새가 내 몸속을 날아다녔지요 내 심장 기슭에 올라앉아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핏줄을 움켜쥐더니 정맥의 강가에 열꽃을 피웠지요 이상하지요 그 작은 새가 내..

일상다반사/시 2014.11.10

김경미, 연희

나도 연희야 외로움을 아주 많이 타는데 나는주로 사람들이랑 잘 웃고 놀다가 운단다 속으로 펑펑그렇지?(나는 동생이 없으니 뼛속에서 묻는단다) 열한살때 나는 부모도 형제도 많았는데어찌나 캄캄했는지 저녁들판으로 집 나가 혼자 핀천애고아 달개비꽃이나 되게 해주세요사람들 같은거 다 제자리에 못 박힌 나무나 되게 해주세요날마다 두손모아 빌었더니달개비도 고아도 아닌 아줌마가 되었단다 사람들이랑 잘 못 놀때 외로워 운다는 열한살짜리 가장열한살짜리 엄마야 민호 누나야 조숙히 불행해 날마다강물에 나가 인간을 일러바치던 열한살의 내가 오늘은내게도 신발을 주세요 나가서 연희랑 놀 흙 묻은 신발을 주세요안 그러면 울어요 외로움을 내가요 아주 많이 타서요 연희랑 잘 못 놀면 울어요달개비도 천애고아도 아닌 아줌마가열한살 너의 봄..

일상다반사/시 2014.11.09

함성호, 지옥의 눈물

보리수나무 아래서 그대와 함께하는 국경의 저녁 나무가 밥을 먹는 식탁에 앉아 나뭇가지마다 환하게 불을 켜고 우거진 가지에 하나 둘, 별이 뜨고 있는 밤을 보네 내가 계절의 별자리를 찾고 있을 때 그대는 벌써 허리를 편 보리수의 융단 같은 가지 꼭대기에서 별빛 같은 손을 흔들고 있네 혹, 그대는 나를 더 멀리 보고 있는 게 아닌지 몰라 그대가 멀어-보리수나무가 남긴 국수 그릇에 얼굴을 넣고 참혹한 죽음을 보네 도대체, 이 물과 새들의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국경에 이르면 누구나 가야 할 곳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제 그곳으로 가야 한다 너에게로- 아름다운 육신이여 왜 우니? -행복해서 그만 울어, 너의 눈물은 독이야 내가 마신 너의 눈물에 어린 풍경은 지옥이고 마르지 않는 지옥의 샘이고, 끝없는 수수..

일상다반사/시 2014.11.09

남진우, 선인장

여인은 선인장처럼 시들어간다 물을 주지 않은 살갗에서 버석거리며 모래알이 떨어지는 동안 허공의 낙타떼는 지붕 위에 머물다가 방울을 울리며 떠나곤 한다 철 지난 옷 속에 가시를 숨기고 여인은 주방과 화장실만 오간다 개수대에 쌓인 그릇이 늘어날수로 현관 앞엔 우편물과 신문이 버려진 채 바래어가고 마룻바닥 위 모래 먼지에 낙타 발자국이 찍혔다가 지워진다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옆에 두고 여인은 비좁은 소파 위에서 웅크리고 잠을 잔다 불타는 천막 속에서 한 남자가 길길이 날뛰다 타 죽어가는 꿈을 꾸며 여인은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 신기루처럼 아물거리며 한 떼의 낙타가 다가오고 있다 모래 바람이 지붕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만삭의 달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선인장 가시를 입에 물고..

일상다반사/시 2014.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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