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다반사/시

나는 어리다, 박시하

윤성님 2015. 5. 9. 09:39
728x90
반응형







나는 어리다

너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못 위의 개구리만큼 작고

해변의 갈매기처럼 낡고

동굴 속 부싯돌처럼 캄캄하다


나는 본다

이슬 위에 맺힌 이슬

어둠 아래 깔린 어둠을

나는 잡는다

줄줄 흘러내리는 것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들을


나는 웃는다

돌부리들이 농담을 건네서

지렁이의 허리가 꿈틀거리니까

온갖 아픔이 저토록 어설픈 모습이라서

가끔은 운다

어떤 사람의 발이 젖어 있어서

함부로 친 펜스가 비구름 색이고

죽은 고양이의 발바닥이 분홍색이라서


나는 안다

부서진 식탁에서 밥 먹는 법을

뺏긴 이불의 따스함과

빛을 잃은 사람의 눈 속에

어떻게 다른 빛이 생겨나는지를

다만, 모른다

너의 목록이 얼마나 다양한지

너의 이마가 얼마나 번쩍이는지

너의 어깨가 얼마나 단단하고

너의 가죽이 얼마나 두툼한지는


나는 느낀다

날아간 새의 날갯짓과

시든 꽃의 향기를

나는 사랑한다

배신한 애인의 좁은 등짝을

검게 부푼 시궁창을

닳은 구두 뒤축에 밴 리듬을

죽은 사람이 남긴 가난한 노래를

병든 달빛 아래의 만루 홈런을

세계의 모든 푸르스름한 반짝임을


나는 흐리다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부를 수 없는 이름을 부르고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듣는다

흘린 피를 술병에 나누어 담고

도둑맞은 눈물로 책을 찍어내며

점점 더 뚜렷이 흐려진다


나는 여기 있다

네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오래,

네가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나는 어리다, 박시하









728x90
반응형

'일상다반사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승자, 가을  (0) 2024.07.01
진은영,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0) 2024.06.28
최금진, 잠수함  (0) 2024.06.27
신경숙, 깊은 슬픔  (0) 2024.06.26
김혜순, 열쇠  (0) 2015.04.27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0) 2015.04.27
이병률. 자상한 시간  (0) 2015.04.27
김선우, 해괴한 달밤  (0) 2015.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