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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시 81

김혜순, 열쇠

역광 속에 멀어지는 당신 뒷모습 열쇠구멍이네그 구멍 속이 세상 밖이네 어두운 산 능선은 열쇠의 굴곡처럼 구불거리고나는 긴 능선을 들어 당신을 열고 싶네 저 먼 곳 안타깝고 환한 광야가열쇠구멍 뒤에 매달려 있어서 나는 그 광야에 한 아름 백합을 꽂았는데 찰칵 우리 몸은 모두 빛의 복도를 여는 문이라고죽은 사람들이 읽는 책에 씌어 있다는데 당신은 왜 나를 열어놓고 혼자 가는가 당신이 깜빡 사라지기 전 켜 놓은 열쇠구멍 하나그믐에 구멍을 내어 밤보다 더한 어둠 켜놓은 캄캄한 나체하나 백합 향 가득한 그 구멍 속에서 멀어지네 김혜순, 열쇠

일상다반사/시 2015.04.27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꽃피는 날은 여러 날인데 어느 날의 꽃이 가장 꽃다운지헤아리다가어영부영 놓치고 말았어요 산수유 피면 산수유 놓치고나비꽃 피면 나비꽃 놓치고 꼭 그날을 마련하려다 풍선을 놓치고 햇볕을 놓치고아,전화를 하기도 전에 덜컥 당신이 세상을 뜨셨지요 모든 꽃이 다 피어나서 나를 때렸어요 죄송해요꼭 그날이란게 어디 있겠어요그냥 전화를 하면 그날인 것을요꽃은 순간 절정도 순간 우리 목숨 그런 것인데 차일피일, 내 생이 이 모양으로 흘러온 것 아니겠어요 그날이란 사실 있지도 않은 날이라는 듯부음은 당신이 먼저 하신 전화인지도 모르겟어요그렇게 당신이 이미 꽃이라 당신 떠나시던 날이 꽃피는 날이란 걸 나만 몰랐어요 이규리, 꽃피는 날 전화를 하겠다고 했지요

일상다반사/시 2015.04.27

이병률. 자상한 시간

의자가 앉으려 하고 있다 사람은사람을 서로 아프게 하여스스로 낫기도 하겠다는데나는 한사코 혼자 앓겠다는 사람 옆에 있다 의자는 의자에 앉으려 애쓰고 있지만꽃과 이 사람은무엇을 애써 누르려 한 적도살겠다고 애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둠이 소금처럼 짠 밤에병이란 것과병이 아닌 것을 아는 시간이 뜨겁게 피었다 의자를 의자에 앉힐 수 없어풀과 나무들과공기들의 땀 냄새를마시고 녹이는 사이 그 바깥은죽을 것처럼 맞춰진 시간들이다시 죽을 것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까치야소용없단다이 밤에 아무리 울어도기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 이병률. 자상한 시간

일상다반사/시 2015.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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